지켜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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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p. 12-13
"예수가공생애 기간 한곳에 머물며 구체적인 사회상을 구현하려 하기보다는 내내 인민들의 삶의 현장을 돌다 미완의 상태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삶의 방향과 결의 지독한 일관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구체적인 사회상보다 더 구체적인 것을 건져 올리게 한다. 예수는 새로운 사회의 실체는 그 체제나 법 같은 형식에 있는게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성원들의 지배적인 삶의 방향과 결에 있음을 되새겨 준다. 그래서 그의 미완은 우리에게로, 우리의 미래로 한껏 열려 있다."

p. 22-23
"가난과 차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갈릴래아 사람들의 저항의식은 늘어만 갔다. 끊임없이 소요와 봉기가 일어났고 대개의 갈릴래아 청년들은 과격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또 죽어갔다. 예수는 바로 그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성장했다. 예수는 마치, 오늘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에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의 소년처럼, 동네 형들과 삼촌들의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다 줄줄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p. 24-25
"알다시피 오늘 대개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도 유다에서 온 메시아도 아닌 '교리 속에서 온 메시아'다. 그 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대체로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는 의견보다는 예수가 사람보다는 높지만 하느님보다는 낮은 존재라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엔 그런 신학 논쟁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내 예수가 하나님의 지위를 얻으면 자신의 지위도 함께 격상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교리의 통일을 통해 자신의 통치력을 한껏 강화할 수 있다는 점도.

그런 정치적 의도로 내려진 결정은 더 이상 다른 견해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정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다. 그 후 오늘까지 거의 모든 지식과 신앙에서 예수는 교리속의 주인공으로 출발한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 으로 보느냐 하는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p. 28-29
"예수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즉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말한 '회개'를 단지 종교적 회삼으로 이해해선 안된다. 예수는 자신의 종교라 할 유대교 안에서 회심하라는 게 아니며, 아직 생기지도 않은 기독교 안에서 회심하라고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예수는 종교적 회심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회심을  촉구한다. 예수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고, 하나님 나라의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내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회개'로 번역된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길을 바꾸다ㅡ 되돌아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p. 36-37
"예수를 포함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대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 즉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갖지 않을 수도 있으며 크든 작든 단지 삶의 일부를 차지할 뿐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에게 유대교는 일개 종교가 아니라 유일한 가치관이자 윤리이자 법이자 정치 이념인 '전적인 정신 체계'였다. 그들에게 유대교는 없었다. 유대교라는 말은 그들의 외부에서 그들의 고유한 정신 체계를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그래서 종교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실은 매우 사회적인 (그리고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종교적 천국으로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선교나 전도로만, 기도를 종교적 간구로만 이해하는 건 본의아니게 그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말로 '새로운 세상'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우리의 말로 '세상을 변혁하는 운동' 이며 기도는 우리의 말로 '신념을 다지고 성찰하는 시간' 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 38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낳는 사람들과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분누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p. 44
"예수는 성전의 그런 권위를 대놓고 반박하기 시작한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말은 자신이 성전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대행자 권한을 독점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소통에 성전이 필요없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또한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거듭된 선언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권위가 가득찬 왕처러첨 근엄한 얼굴로 성전 지성소에 거하며 비천한 인민들과 직접 만나길 거부하는 분이 아니라 늘 인민의 삶 속에 함께하며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분이라는 것이다."

p. 49
예수는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의 사랑이 닿는다고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는다. 예수는 하느님의 관심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고 기존의 모든 가치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재정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인'은 누구인가?
사랑과 존경마저 돈으로 사고 팔리는 이 완전한 물신의 세상에서 '율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경제적 경쟁력'이다. 경제적 경쟁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곧 죄인이다. 그들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품위와 존경을 유지할 수 없으며 인생과 미래에 대한 꿈도 가질 수 없다. 2000년 전 죄인들이 '율법을 지켜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듯, 그들 또한 '경쟁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런 현실에 체념한다. 예수가 그랬듯, 우리는 그 '죄의식의 체제'에 주목해야 한다.

p. 52
예수는 특이하게도 바느질, 술 담그기 등 여성이 전담한 노동의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성 노동을 부각함으로써 그리고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들에게 집중하는가를 좀더 분명히 드러낸다. 예수는 줄곧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대접 못 받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예수는 그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드러낸다. 여성들은 토라를 공부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으며 토라를 모르는 그들은 온전한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았다. 결국 가장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하층계급으로서의 억압과 여성으로서의 억압이라는 이중적 억압에 사로잡힌 하층계급 여성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갖는다. 단지 그들을 동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임을 일깨운다.  

p. 62
지금 여기에서 고통받는 사람과 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라는 예수의 말은 혁명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이해에 의해 자칫 오해될 수가 있다. 예수의 말은 고통받는 사람과 죄인들이 지배계급이 노리던 부와 권력을 빼앗아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그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세상이다.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수고와 고통 덕에 안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인권을 회복하는 일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회복이 세상의 회복이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도정에서 주인공인 것이다.

p. 63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개치는 일이다. 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책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흉내 쇼'를 적은 책이 아니다.

p. 66
평화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무작정하게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가 아니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느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p. 68
예수는 '신성모독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란 모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앙은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종교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이 진행하는 역사에 인간이 참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인간이 마든 종교체제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의 성실과 충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 속에서 하느님이 벌이고 있는 역사, 즉 하느님 나라 운동에의 참여인 것이다.

p. 68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가진 어떤 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일 수 있으며,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죽어 하느님이 뭔지 예수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제3세계의 수많은 인민들 가운데에도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이 허다한 것이다.

p. 78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싸우고 헌신하는 사람이 싸우고 헌신하는 그만큼 세상이 변화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시시각각 보람과 기쁨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세상은 늘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며 또 포기하곤 한다. 지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p. 79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 왔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p. 180
예수의 태도는 우선 오늘날의 교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스스로를 '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깨우침을 준다. 그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싱을 뿐이다. 예수가 '그래도 성전인데' 하며 침묵하던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쳤듯이 우리는 '그래도 교회인데' 하며 침묵하는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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