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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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기다린 위로...

2:25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 그에게 임하여 있었다.

 

사람이 기다린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

예수님께선 진정으로 이스라엘을 위로하신걸까? 하셨다면 어떻게?

 

내가 이런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한국 밖에서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국이 그립다기보다는 들어가기가 점점 겁이나고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까지 든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점점 나에게 맞지 않는 느껴진다..

 

한국이 기다려야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것일까?

북조국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는? 내가 감히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있을까?

위로가 온다면 어떻게 임하게 될까? 내가 그들에게 선물로 주고픈, 미디어 교육이 작은 위로라도 될수 있을까?

 

그냥 연구로 끝내고 싶지 않은데… 정말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는 공부이고 싶은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학문을 통해 위로받을 있는 이들은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을까?

 

누가복음 2장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렸다는 시므온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나 역시 한국과 북조국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싶고, 이 세상사는 동안 그 하나님의 위로에 조금이라도 쓰임받는 자가 되었음 좋겠다.

 

북조국을 향한 마음들이 나로 하여금 공부를 시작하게 했지만,

그 전에 한국에서 먼저 내가 공부한 것들을 적용하고 싶은데..

솔직히 지금으로선 한국에 들어가는것에 대해 영 자신이 없고.. 내키지도 않는다..

 

북조국뿐 아니라 남쪽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고.. 위해서 기다리다 보면 내 마음이 그곳을 향해 움직일 때가 오겠지..

 

근데 이명박이 정말 대통령이 된다면, 난 정말 하나님이 한국을 포기하셨다는 생각까지 할거 같다



커뮤니케이션...

2월생이여서 빨리 학교에 들어가 대학생도 일년 빨리 된 나.. 
한국나이 19살에 대학에 들어가 지금 나이 28이 될때까지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해오고 있다.

언론정보문화학부
media ecology
mass media & communication...

이름도 이렇게 조금씩 다르고 그 안에서 내가 집중해서 공부한 내용도 다르지만..
암튼 예정되로 간다면 난 30대 초반즈음.. 아님 그보다 빨리.. 커뮤니케이션 관련하여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아마 평생을 이와 관련한 연구를 천직으로 여기며 그렇게 공부하면서 살게 될것이다.

그렇게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론들을 배우고 적용하면서도 배우지 못한 걸 요즘 깨달은게 있는데...

그냥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정말 맘대로 표현하고..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의사표현을 척! 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과 소통한다는 건..

박사학위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말도 안되게 행복하다는 거다.

의성어와 의태어, 그리고 우리들만의 신조어가 나날이 늘어나며
남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외계어에 비슷한 단어들이 난립한 그사람과 나의 대화를 돌아보며..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수기 20장 - 아론의 죽음

오늘 읽은 말씀 - 민수기 20장

아론이 결국 죽고 말았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때만 해도 자신이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므리바 샘에서 너희들이 나의 명령을 거역하여 나와 다투었기 때문에, 아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그 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à 이 이유로 인해 결국은 들어가기 전에 죽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론은.. 아론의 역할을 한 것이라 믿는다.

무엇이든 꼭 완성을 해야만 그 몫을 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또 그만큼 간 것이 아론의 몫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보여주셨고.. 비전/꿈을 주셨지만 결국 거기 까지 가지 못한 것이 아론책임은 아니라고 본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퉜지만.. 그거때문에 그 길을 막으셨다면 사실 하나님일을 할 인간은 하나도 없으리라 본다. 적어도 나 스스로만 돌아봐도.. 하루에도 몇번씩 넘어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실망스런 일들만 하는데.. 그런 일 하나가지고 길을 막으신다면 그 누가 한발자욱이라도 나아가겠는가..

그냥.. 거기까지가 아론의 몫이였기 때문이었을거다. 그의 역할과 모세의 역할, 그리고 여호수아가 담당해야 할 몫이 다 달랐던 거고 그들은 그 몫을 담당한거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 보여주신 큰 그림이 있다. 생각만해도 벅차고.. 흥분되는 그런 그림.. 꿈.. 비전.. 감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꿈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만큼, 나답지 않은 확신과 자신에 찬.. 그런 꿈이다.

그 그림의 실체화가 조금씩 내 눈에 보이는 요즘.. 어디까지가 우리 부부의 몫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몫을 어떤 모습으로 감당하게 하실지...

매일매일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순종함으로 나아가며 내 몫을 아낌없이 다 감당할 수 있도록..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겠다.

순종하지 않아 끝까지 길을 가지 못한 이들도 이렇게 말씀의 한 부분이 된 것처럼, 내 부족한 모습까지도 그리스도의 풍경에 없어서는 안될 한 부분이고 싶다.

어디까지가 내 몫인지 알수 없지만.. 거기까지.. 숨이 찰때까지.. 그래서 더이상 못달릴때까지.. 그렇게 달려가야지..
그렇기에 이 버거운 일상이.. 그리고 내 몫으로 주어진 감당하기 벅찬 이 모든 일들이..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벌써 5년이라니...

2002년 10월 17일. 목산교회 편집실에서 그를 처음만났다.
편집의 특성상 편집기에 일 시켜놓고 기다려야 할때가 많았는데, 그때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당시 만난 곳은 목동, 내가 살던곳은 삼성동..
교통편이 복잡해서 전철끊기기 전에 가겠다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했더니 하던거 마져 하고 가라고 그가 날 잡았다.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삼성동까지요?" "응, 데려다 줄게. 마져 하고 가." "어차피 오늘 끝내지도 못할거 같은데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래도 최대한 많이 해놓고 가면 좋잖아." 그렇게 날 설득하던 그의 말대로 난 새벽한시까지 거기에 있었고 그는 삼성동까지 날 데려다 주었다.
주위에 owner driver 가 거의 전무하던 시절, 밤늦게 승용차 앞에 앉아 서울밤거리를 달려본게 태국으로 떠난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8년도 넘게 난 서울야경을 버스가 아닌, 자가용안에서 본거다.  편집하면서, 그리고 차안에서 말이 참 잘 통했다는거.. 그리고 그날 본 야경이 참 이뻤다는 거.. 너무 이쁘다고 흥분하는 나를 참 재밌게 그가 쳐다봤다는게 기억이 난다.

그후로 편집때문에, 그리고 원본 테잎을 받으러, 그렇게 몇번을 더 만났고 통화도 몇번 했다. 업무적인 이야기 말고도, 사는 이야기, 세상이야기, 신앙이야기 등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너무 괜찮은 사람인듯해서 내 친한친구를 소개시켜주려고 했었더랬다.  소개팅하라고 설득하던 (전화로) 나에게 그가 내던진말... "난 네가 좋은데 넌 왜 자꾸 네 친구를 소개시켜주려고 하니?"

훗.. 사귀자는 오빠의 말에 o.k. 를 하기까지 3주도 더 걸렸었다.
막상 사귀고 나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이회창을 지지한다는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대선 다음날 그에게 헤어지자고 까지 했었다.  (지금생각하면 웃기지만 당시 나의 충격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는 날 붙잡았고.. 그렇게 몇번의 크고작은 위기를 넘기고 난 유학을 갔다. 

유학을 갈때만 해도 이 사람과 언제까지 사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근데 몸은 멀어져도 진심은 이어졌다.  워낙 결혼이란 제도에 불신이 많았던 나였고, 또 35살전에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였기에 결혼직전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결국 26살에 "이 사람이었기에" 유부녀가 됬고..
"이 사람이기에" 지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결혼하면 남자들이 많이 변한다던데..
울 신랑은 결혼하고 나서 더 착하게, 더 신실하게, 더 멋있게 변한 케이스다.
그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너무 감사하고, 내가 태어나서 만났던 그 누구보다, 그리고 그 어떤 위인보다 울 신랑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결혼하고 2년이 더 지난 지금.. 매일매일 그가 더 좋아진다.  그와 삶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함께 하면서.. 이제껏 살아보지 못한 또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그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미치도록 좋다.  연애할때보다 결혼하고 나서, 결혼초반기 보다 지금이, 그를 더욱 사랑하는 나 자신을 본다.
앞으로 50년, 아니 죽고나서까지도.. 영원을 함께 하고 싶을 뿐이다.



다시 살게 된다면

밑에 있는 시는 울 아버님께서 식구들간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주신 사이트에 어머님께서 올리신 "다시 살게 된다면" 이란 시다.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느낌은... 아 참 좋다.. 였고, 그래서 게시판에 접속할 때 마다 읽었다.
그리고 한 3번정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네브라스카의 수사니까 가능한 내용이 아닐까? 수사가 아닌 일반인이 어떻게 이렇게 살수 있지? 라는 회의감..

그리고 그뒤에 시간이 지나 몇번 더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좀더 열정적으로 살겠다" 고 하면서 이런 삶이 어떻게 열정적인 삶일까.. 하는 의구심..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 든 생각은, 이 세상에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수사라는 사람이 심각하지 않게 가볍게 살겠다는 이런 시나 쓰고 있다니... 하는 한심한 마음...

그러다가 또 다시 읽으니 참 닮고 싶은 마음이라고 느껴졌다.

투쟁하듯 치열한 삶을 아주 오랫동안 동경해 왔고, 사회적 고민과 성찰없이 사는 기독인들에 대한 분노가 최근까지 있었던 내가 (지금도 아주 조금은 있다) 그 당시 이 시를 읽었다면 "아니 어떻게 수사라는 사람이 이런 시를...." 하고 화를 냈겠지만..
신랑님을 통해 새로운 삶의 스타일에 눈떠가고 놀라워 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마음이 조금은 닮고 싶긴 하다. 정말 100%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알다시피, 나는 날마다,  매 시간 앞날을 걱정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산 사람입니다."
--> 요건 100% 내 얘기고..

"진짜 어려운 일이라면 부닥쳐 보겠지만,
미리 상상해서 근심거리를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 요 부분은 요즘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부분... 미리 걱정하기.. 내 특기인데 이젠 정말 그만해야 겠당.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순간순간을 누리고 살겠다는 부분과, 데이지 꽃을 더 많이 꺽겠다는 부분도 맘에 든다.  생각하면 마음이 참 좋아지고...

하지만 제목에서 암시하듯 이 시의 제목은 "다시 살게 된다면" 이다. 결국 이 수사님은 이렇게 살지 못했던 거다. 그냥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시를 쓴게 하닐까 싶은데... 그것도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는게 아니라 다시 살게 되면 이렇게 살겠다고 쓴걸 보니 나이가 아주아주 많으시거나 큰 병이 걸리시진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막상 이 시에 있는 것 처럼 일생을 살고 나서는 "좀더 치열하게 순간순간을 고민하고 돌아보며 최선을 다해 살겠다" 라는 시를 쓰진 않으셨을지...

암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되어선 안되는 법..
그저 "carpe diem"이란 말처럼 순간순간을, 그리고 매일매일을 그렇게 seize 하면서 살고 싶다.
====================================================
다시 살게 된다면 - 네브라스카의 한 修士


다시 살게 된다면, 다음 번에 나는
더 많은 실수를 하도록 노력하렵니다.
긴장을 풀고 유연하게, 이번 여정에서보다는
좀더 바보스럽게 살겠습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행을 더 많이 다니렵니다. 좀더 열정적으로 살렵니다.
등산을 더 많이 하고, 강에서 수영도 더 많이 하고,
석양도 더 많이 지켜보겠습니다.
많이 걸으며 많은 것을 보겠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더 많이 먹고 밥은 덜 먹겠습니다.
진짜 어려운 일이라면 부닥쳐 보겠지만,
미리 상상해서 근심거리를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알다시피, 나는 날마다,  매 시간 앞날을 걱정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산 사람입니다.
제 나름의 시간도 갖기는 했었지요.
다시 살게 된다면, 그런 시간을 더 많이 갖겠습니다.
실로, 날마다 수년을 앞서 사는 대신으로 나는
그 어떤 것도 아닌 순간순간을 누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온도계, 보온병, 우비, 그리고
진통제 없이는 어느 곳에도 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산다면, 예전과는 달리 가볍게 이곳 저곳에 가고,
일하고 여행하겠습니다.
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나는 이른 봄에 맨발이 되어
그렇게 늦은 가을까지 지내겠습니다.
게으름도 더 부리겠습니다.
별로 좋은 점수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회전목마를 더 많이 타겠습니다.
데이지 꽃도 더 많이 꺾겠습니다.



요즘 민수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들과, 또 그것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받는, 제법 잔인한 벌들을 보면서 주님안에서 온전한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것과,  discipline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의 균형이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신랑이랑 일년넘게 함께 살면서 그의 균형잡힌 자유하고 discipline 된 삶이 참 대단해 보이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가락이 있는지라 난 아직도 discipline 된 삶을 추구하면서 자유하지 못함에 조금 괴로워하는.. 그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게 아닌 가 싶다.

어차피 삶이란 계속 다듬어져 가고 자라나는 자아의 순간의 최선이 모일때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법.. discipline 된 스스로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계속 채찍질 하는 나 자신에 대해 자유해지는 것이 나에게 지금 필요한 자유함이 아닐까 싶다.


내 몸..

태어나서 한번이라도 한 계절을 안 아프고 지나갔던 적이 있었나 싶다.

기억도 희미한 아주 어릴 때야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초등학교들어갈 때부터 난 삐쩍 마르고 키가 멀대같이 컸던 그런 아이였다. 6학년 신체검사에서 내 키는 163.5, 몸무게는 42.5. 당시 담임보다 내가 더 컸었고 초등학교 졸업할 때 키가 이미 167정도였으니까 나 스스로 180정도는 당연히 클거라고 미리 걱정까지 했더랬다. 그러더니 중학교 올라가서는 키가 안컸다. 지금 내 키가 171 정도니까 13삻때부터 28살인 지금까지 고작 4센티미터정도가 큰거다.

 

중 고등학교때도 몸무게 상으로는 참 마른편이었는데 유난히 팔다리가 튼튼해 보이는 체형 때문에 억울할 적도 많았다. 언젠가 여성지에서 고현정의 키와 몸무게를 보고 나와 비슷한데 왜 내 몸은 저렇게 안 이뻐 보일까..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대학다닐시절도, 왠만한 키와 몸무게만 대면 모델 프로파일 (요즘 모델들은 175가 넘는게 기본이지만 나 대학다닐때만 해도 내 키정도면 일반인 정도면 큰편이었고 나 정도 되는 모델들도 꽤 있었다.) 수준인데 막상 나 스스로 보이는 건 그정도가 아니여서 스스로 아리송 했더랬다. 참고로 난 작년까지 한번도 배가 나왔던 적이 없었던, 하지만 얼굴은 제법 통통하고 팔다리가 몸에 비해 살이 붙어있는.. 그런 몸매였다.

 

물론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고, 건강 때문에 운동은 제법 꾸준히 한 편이었다. 초등학교를 들어간 이후, 단 한 학기도 아프지 않고 넘어간 적이 없다. 늘 몸살에 툭하면 탈이났던 나는.. 자주 신경성 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6학년때는 시험보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시험보는날 까지 심한 몸살에 열까지 펄펄 끓어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는데 반장까지 하면서 시험 못보면 너무 창피하니까 다가올 수치심에 벌벌 떨다가 1교시 셤 보면서 쓰러진거다. 당시 난 13반 반장이었는데 2반 남자 선생님이 와서 업고 양호실까지 왔단다. 기억은 안나지만 암튼 깨보니까 3교시가 지나있었다. 그렇게 난 늘 예민하고 약했던.. 하지만 보이기에는 튼튼해 보여서 사람들이 아픈걸 잘 모르는.. 그런 아이었다.

 

대학때도, 유학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늘 아팠고 미국와서도 한 학기에 2-3번 정도는 너무 많이 아팠다. 아프면서도 공부는 해야하니까 쉬지도 못하고.. 그렇게 덜덜 대면서 도서관에서 나오는데 한번은 세상이 내 앞에서 빙빙 돌더라.. 공부하다 죽는다는게 이런건가.. 하는 생각에 서럽기도 하고 힘들어서 엉엉 울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간적도 있었다.

 

결혼하고 나 혼자 필라에서 사는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늘 힘들었고, 아팠다. 공부가 버거웠다. 그런데 지난학기, 그니까 오빠와 함께 산지 일년이 채 안된 지난학기.. 내 기억에는 처음으로 큰 병치레 없이 한 학기가 지나갔다. 오빠오고나서 내 맘이 너무 편해진거다. 공부도 더 잘 되고 그냥 모든게 편안했다. 오빠 진로문제가 우리가 기대한 대로 바로바로 해결되진 않았지만 10년뒤의 일까지 미리 걱정하던 평소의 나 답지 않게 그냥 다 잘 될거라는 확신에 그냥 마음이 편안했다. 오빠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행복했고 내 인생에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스트레스 안받고 공부한 적이 있었나 싶을만큼 공부도 너무 쉽게 느껴졌다. 공부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컴퓨터와 요리로 푸는 울 신랑님의 일취월장하는 요리실력덕분에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다. 요즘은 울 신랑, 아침마다 도시락까지 싼다. 덕분에 엥겔지수 100 수준의 우리집 생활비가 많이 절약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엥겔지수 100이다.)

 

그렇게 너무 맘이 편해서였을까?

살이 무려 12kg 이나 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에 살도 조금 붙었고 예전부터 튼튼하던 팔다리는 거의 우람한 수준까지 되버렸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결혼하기전에는 30kg 도 넘게 차이나던 울 오빠와 내 몸무게가 (울 오빠는 보기보다 많이 나가고 난 보기보다 적게 나가는 스타일..) 이젠 20kg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 (참고로 키는 5cm 차이)

오랜만에 이메일 보낸 친구는 싸이에서 보니 내 얼굴에 살이 올랐다고 이메일에 썼고, 한국에서부터 날 봐었던 이곳에 있는 언니는 나보고 한국에 가기 전에는 꼭 살을 빼라고 한다. 미국에선 보기 좋지만 한국에선 안된다고.. 오빠와 내가 자주가는 한국음식 파는 푸드트럭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고 왜 이리 살이 많이 쪘냐며 놀리신다.

 

솔직히 짜증난다.

태어나서 이런 대접 받아본 적이 없다가 갑자기 통통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도 화가나고 미국애들은 다들 보기좋다고 그러는데 한국 사람들만 삐쩍 마른 수수깡 몸매를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살이 쪘느니 빠쪘는니, 더 빼라느니.. 참견이 많은지 모르겠다.

 

솔직히 예전에는 이쁘다는 말도 많이 듣다가 요즘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살이 쪘다고 하니까 적응도 안되고 아직도 다른사람 이야기 하는 거 같다.

 

하지만 중요한건..

살이 쪄서 몸이 힘든게 아니라.. 내가 너무 건강하게 됬다는 거다. 요즘 오빠랑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 간식도 혼자 살때보다 더 적게 먹고, 식사도 더 건강하게 균형잡힌 식단으로 하는데 왜 이렇게 계속 살이 찔까.. 이해가 안되다가 내린 내 결론은 스트레스이다. 전에는 내 특유의 예민함 때문에 늘 날카로웠고, 스트레스가 머리 끝까지 발끝까지 지배할 때여서 그렇게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쪘지만.. 이젠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니 다 영양분으로 흡수되고 몸도 건강해 진거다. 거기다 울 어머님 아버님이 좋은 한약도 수시로 보내주셔서 내 몸의 회복이 더욱 빨라진거 같다.

 

솔직히 뚱뚱한 정도까지 간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이정도면 아직까지는 보기 좋은 수준인거 같고.. 거기에다 공부하면서 느끼는 체력도 전보다 몇배나 더 좋아졌고.. 아프지도 않고.. 행복하니까 그냥 이 상태가 참 좋다.

종합시험 끝내고 Proposal Defense 하고 나서 내년 가을즈음에는 임신해서 내후년에는 아기를 낳고 싶다는게 우리의 2세 계획인데.. 배에 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푹 들어갔던 예전보다 오히려 지금의 몸이 우리 아기가 지내기에는 더 좋은 상태일 거 같아 감사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주위에서 참견하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이 난다. 이번 겨울에는 오빠 비자문제로 한국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한국 들어가서 괜히 살쪘다고 한마디씩 할 참견많은 주위 사람들 생각하면  그냥 식구들만 만나고 돌아와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유난히 요즘들어 사람들이 내 몸갖고 이렇다 저렇다, 살 빼라 등등 참견하는 인간들 때문에 너무 속상해 할때마다 오빠는 지금이 가장 이쁘다고, 삐쩍 말랐을 때 보다 건강한 지금이 훨씬 더 이쁘고 좋다고 말해주면서 꼬옥 안아준다. .. 이사람의 자상함과 넓은 마음이 나로 하여금 12 kg 이나 찌게했지만, 결국 이 사람의 이런 사랑과 마음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계속 느끼면서 살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할수 없지..

 

이번 방학동안 열심히 운동해서 오빠는 3kg 2 kg 정도를 뺐다. 그냥 앞으로도 이렇게 건강하게 먹으면서 운동하면서.. 튼튼한 몸으로 공부하고 오빠와 이쁘게 살아야 겠다. 남의 몸까지 참견하며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무시하면서 (내 성격에 될까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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